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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구 금곡동에 있는 충장사

좋은 날. 2016. 3. 17. 22:38

 

●탐험 일시 : 2013년 6월 13일 14시 ~ 17시

●탐험 장소 : 화암마을 당산나무, 충민사, 충장사

●팀명 : 목요팀

●작성자 : 김화선

 

김덕령(金德齡 1568~1596년8월)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광주(光州) 자는 경수(景樹) 호는 충장(忠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그 세상을 구할 영웅이 태어난다는 뜻이다.

일본의 침략으로 이 강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던 임진왜란.

그 혼란의 시기에도 어김없이 영웅은 태어났다.

 

임진왜란의 영웅이라면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를까?

아무래도 이순신 장군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바람 앞에 놓인 등불 같았던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이다.

하지만 어디 이순신 장군뿐이겠는가?

여기 외적의 침략에 신음하던 조선 만백성의 희망이고 영웅이었던 김덕령 장군이 있다.

 

그는 가난한 백성의 아들로 태어나 큰 뜻을 품고 무에를 닦은 김덕령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潭陽)지방에서 의병5,000명을 모집하여 출정하였다. 선조 28년(1593) 전주(全州)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

으로부터 익호군(翼虎軍)과 선조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의 군호를 받았다. 선조 28년 고성지방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하였으며 이후 장군포에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과 수륙연합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진해(鎭海), 고성(固城)지방을 방어하였다. 또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장군과 여러차례에 걸쳐 왜군을

무찌루니 장군의 위명(威名)은 높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몽학(李夢鶴)의 난 관련자로 무고되어 처형당하나

1661년(현종2년)에 억울함이 밝혀져서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증 병조참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7년)에 다시 증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88년(정조12년)

증 의접부좌참판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이 내려졌다.

1678년(숙종4년)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將)이다. 

 문화관광해설사 김천식님으로부터 충장사에대한 해설을 듣다.

 충장공신도비(충장공 후손들이 2004년 2월 23일에 세우다) 

  충장군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곳(건물양식은 일출목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봉형식)

 충장공 김덕령 잔군의 영정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묘역(1975년에 정비되었다)

  광산김씨의 선조나 후손들의 묘도 있다.

김덕령 장군과 그의 부인 홍양이씨 및 그의 형 김덕홍, 아우 김덕보 등 충효를 기린 비(정조 1788년)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유품인 의복(민속자료 제111호 지정)과 충장공의 관이 보관되어 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시신을 모신 관

 

 

 

전체면적 6,000평에 충장공 김덕령 장군를 기리는 사당이 아름다운 조경으로 잘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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